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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내고장 충청남도 대산(큰산과 연관)읍의 수백년의 유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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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초등학교 100년사를 돌아보며.

 

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현재 제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1922년 일제강점기의 교과서

 

대산이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이에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큰 산이라는 한자의 어원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619년(광해 11)에 간행된 호산 록 산천조에서 "대산! 그 산은 바다 가운데 꿇어앉은 듯한, 맑은 날에 산 정상에 오르면

먼 곳까지 잘 보인다." 라고 하여 이는 큰 산과 연관하여 대산의 연원을 말해 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대산은 망일산으로 망일산은 서산의 서북부지역에서 높이 우뚝 솟아오른 해발 302M의 산이며,

이 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계가 탁 트여 공군 레이더 기지가 자리 할 만큼 좋은 입지적 여건을 갖추고 있어

위용과 기품이 있는 명산 입니다.

 

이로써 큰 산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망일산에 연유되어 대산 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산이란 지명이 문헌에 기록된 것을 살펴보면,

태종실록 1412년(조선 태종 12) 8월 20일 3번째 기사에 "배를 잘 관리하지 않은 충청도 대산 만호 박의 손을 논죄하다."라는

기록이 있고, 

 

세종실록 1426년(세종 8) 8월 16일 정축 조에 충청도 감사의 절제사가 합동하여 아뢰기를

"도내에 있는 서산의 다리곶, 흥양, 토진, 맹공 등 네 개의 목장을 친히 답사하여 살펴보니 불편한 점이 있어--중략--대산 꽂은

수초가 풍부하고 목장 축조하는 공역도 편리하게 되었으니--중략--큰 말은 대산곶에 방목하고 작은 말은 흥양 곶에 방목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어 관명으로, 또는 지명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 산! 하면 느낌이 좋습니다.

사용하기 시작한 역사도 길고,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것은 대산이란 이름이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산이 대산면으로 오랫동안 지내오다가 대산읍을 승격된 것은 1991년의 일로써, 당시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읍 승격 이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임해공단과 대산항만, 자원비축기지가 건설되는 등 많은 발전을 가져와 원유정제와

석유화학 제품 생산, 임해 관문의 물류 거점 지역으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산지역은 고려말 1391년(공양왕 3)에 수군이 창설된 이후 조선말 1895년(고종 32) 군제 개혁 때까지 500여 년간 간단없이 

조정의 군사전략에 따라 장소를 옮기며 해상을 방어하는 군진이 있던 곳입니다.

 

우리 대산은 서산군 소재지로부터 북으로 50리에서 90리에 걸쳐 경기만을 향하여 돌출한 반도 지역이며,

동으로는 서산만을 사이에 두고 당진군 대호지면과 마주하고, 서로는 가로림만과 태안군 이원면을 넘어 황해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경기만 100여 리를 건너 인천이 바라보이는 곳입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통하여 삼남지방의 세곡을 경도에 운반하기 위해서는 선박을 이용하여 조운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조운의 

항로로는 보령군의 오천 앞바다, 태안군 근흥면의 안흥 앞바다, 서산시 대산읍의 황금 앞바다를 반드시 경유해야만 되는데

이 해란에는 조운을 약탈하는 수많은 왜구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우리 대산읍의 왜구침입 상황을 살펴보면 고려 공민왕 원년인 1352년 안흥에 많은 왜구가 침입했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태조 원년 1392년에 고만량(현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 송도)에서 수군만호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1408년(태종 8)에는

왜선 23척이 침입하자 충청수영 수군 첨절제사 현인규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발호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지방의 방위체제로 육지에서는 병마 절도 사영(종 2품)을 설치하고

해안방어 제제로 수군 절도 사영(정 3품)을 설치하고 그 밑에 각 해안의 요충지에 속진이 설치되었습니다.

 

소근진 도만호, 후근 이포, 파지도 만호(대산포), 당진 만호(박지포), 대진 만호(신평 한진리)등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조선조 초기 충청도 연해 여러 곳에는 왜구가 출몰하여 조운을 약탈하고 민가에 침입하여 많은 피해를 입히는 심각한 상태가

빈번하였고, 왜구의 이러한 만행에 대처하기 위하여 충청수영의 휘하에 속진을 설치하였는데 정확히 언제 설치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1398(태조 7)  5월에 수군의 관직을 제정하였고 1399년(정종 원년)에는 종래의 선군체제를 정비하고 소규모의 수군을 각 요해지에 

분 둔하여 유사시에 봉화 신호로 서로 돕도록 조치한 바 있는데 이때에 서해 요충지의 한 곳인 우리 고장 황금산 아래에 군선을 분견하였으니. 이것이 우리 고장에 수군이 주둔한 시초가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충청도 대산 만호의 직함은 충청도 경차관 노상이 충청도 대산만호 박의 손의 죄를 품신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 즉

"조선왕조실록" 1412년(태종 12) 8월 20일 임 자조에 보입니다.

 

"경차관 노상이 충청도 대산 만호 박의 손의 죄를 청하였다. 박의 손이 영솔하고 있는 중. 대선이 썩어서 못쓰게 되었는데도 수리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과제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태종 12년 이전인 조선조 초에 이미 대산 만호진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고 한편 충청 도읍지 (영조~현종간) 평신 진지 연혁 조에는

 

"예부터 전하기를 대산면은 서산군에 속하였다. 언젠가(모년) 황금산 아래에 진이 설치되었는데, 언젠가 마장을 축조하고 감목관을

겸해서 망일산 아래로 옮겨졌고 다시 지지난번 임진년(1712년 숙종 38)에 삼길산 아래로 옮겨졌으니 지금의 평 신진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조 초에 대산 해안에는 지금의 대산읍 독곶1리 황금산 아래에 진을 설치하고 대산 만호라 호칭하였음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1426년(세종 8) 대산곶에 국 마장을 축조하라는 명에 따라 대규모 마장을 축조하게 되는데 이때 많은 인력이 요구되므로 황금산 아래에 설치된 대산 만호가 마장을 축조하고 감곡관을 겸해서 망일산 아래 지금의 대산읍 소재지 구진으로 옯겨졌습니다.

 

대산 만호진의 설치 당시 군세는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고, 1426년(세종 8)에 대산 목장을 구축키 위하여 본진 군선이 망일산 밑으로 이동할 당시의 군세는 병선 13척, 별선 2척, 무 군선 1척, 수군 790명이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조선 초에서 1426년(세종 8)까지 황금산 밑에 있던 대산 만호진은 망일산 밑으로 옮긴 후 세종 8년 가을 병조의 명을 받은 

대산 만호는 군선을 이끌고 망인산 서편 밑에 주둔하여 감목관을 겸하며 목장을 구축하였고 공역이 빨라 1년 만에 완축하였습니다.

 

조선초에 황금산 아래에 설치되었던 대산 만호가 1426년(세종 8) 망일산 아래 구진으로 옮겨와 마장 축조의 임무를 마치고

세종 1428년(세종 10)에 대산포의 병선을 파지도(현 서산시 팔봉면 고파도리)로 병선을 옮겨 정박하게 하고 대산 만호를 

파지도 만호로 개칭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0년 1월 4일 정해조를 보면

충청도 감사가 계하 기를 "대산포의 병선을 파치 도로 옮겨 정박시키소서" 하니 정부와 육조에 명하여 함께 의논하게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계한대로 따르되, 그 만호, 천호의 직함은 모두 파치도만호, 천호라 일컫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 보아 왜구가 침입하는 충청 서해의 방어 기능을 시행하는데 유리했던 파치 도로 1428년(세종 10)에 옮기고 파치도의 지명을

따서  파치도만호로 직함을 변경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결정으로 목마장의 축조 공역을 마친 대산 만호가 파치도만호로 변경되고 군선을 영솔하고 현 팔봉면 해중 30리에 있는 지금의 고파도(파치도)로 이동하였으나  그런데 이때에 병선은 파치 도로 옮겼으나 지위 관인 만호은 대산포에 머물러 지휘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는 세종실록지에 충청도 조에 "파지도 만호가 서산군 북쪽 대산포에 머무르고 있는데 거느린 것이 병선 13척, 별선 2척, 무 군선 1척, 선군 790명이라는 기록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종실록 지리지는 1425년에 발간된 경상도지리지를 비롯한 팔도지리지를 모아 편찬한 신찬팔도지리지를 수정하고 정리하여

1454년(단종 2)에 만들어졌는데 이때가 대산 만호가 파지도 만호로 변경된 직함을 갖고 파지 도로 병선을 옮긴 지 27년째 되는 해로

대산포에 병선이 머무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를 수 있지 않을까도 추정해 봅니다.

 

1459년(세조 5) 1월 15일 병조에서 충청도 수군 처치사가 장계를 올리기를 "파지도 만호 영이 바다 가운데 30리에 있어 군선이 왕래하는데 어렵습니다. 청컨대 고영으로 옮기소서"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조치로써 망일산 아래에서 고파도로 이동한 지 32년 만에 파치 도영은 다시 망일산 아래 예터(대산포)로 복귀하였고 고파도에는 

파지도 만호의 병사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가장 큰 군사적 위협이었던 왜구 침범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로 조선에 대한 침략을 자제했기 때문에 파지도의

군사적 기능이 감소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비록 그 이유를 군선 왕래의 불편으로 들고는 있으나, 병농 일치제의 군사제도 하에서 파지도 만호 선군의 대부분이 대산포를 중심으로 생업에 종사했을 것으로 보면 고영으로의  복귀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대산읍의 유래는 내일도 계~속 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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